톨레도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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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톨레도 대성당은 스페인 톨레도에 위치한 대성당으로, 13세기에 고딕 양식으로 건설되었다. 1085년 톨레도를 재정복한 알폰소 6세 시대에 모스크를 기독교 대성당으로 개조한 것이 기원이며, 1222년 교황 칙서를 통해 현재의 대성당 건설이 승인되었다. 현재의 배치는 로드리고 히메네스 데 라다 대주교 시대에 결정되었으며, 프랑스 고딕 양식의 영향을 받아 스페인적인 특색을 더해 건축되었다. 내부에는 다양한 예배당, 제단화, 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엘 트란스파렌테 등의 예술 작품이 있으며, 16세기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제작된 레하(장식 철제 스크린)가 설치되었다. 톨레도 대성당은 종교 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스페인과 아메리카, 필리핀 등지에서 유사한 공간 배치를 가진 건축물들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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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도 대성당 - [지명]에 관한 문서 | |
---|---|
일반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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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톨레도 대성당 |
본래 이름 | Catedral Primada Santa María de Toledo (에스파냐어) |
위치 | 톨레도 (스페인) |
국가 | 스페인 |
종파 | 가톨릭 교회 |
교구 | 톨레도 |
상태 | 대성당 |
기능적 상태 | 활동 중 |
건축가 | 마스터 마르틴 페트루스 페트리 |
건축 양식 | 고딕 건축 |
착공 | 1227년 |
완공 | 1493년 |
길이 | 120m |
너비 | 59m |
네이브 너비 | 18m |
높이 | 44.5m |
대주교 | 프란시스코 세로 차베스 |
주임 사제 | D. 후안 산체스 로드리게스 (참사회 사제) |
오르간 연주자 | 펠릭스 곤살레스-모히노 바르톨로메 |
웹사이트 | http://www.catedralprimada.es/ 톨레도 대성당 공식 웹사이트 |
역사 | |
봉헌일 | 587년 |
세계유산 | |
세계유산 이름 | 고도 톨레도 |
국가 | 스페인 |
등재 기준 | (1)(2)(3)(4) |
등재 연도 | 1986년 |
URL 번호 | 379 |
2. 역사
톨레도 대성당에는 스페인 역사 속 여러 군주들의 묘가 안치되어 있다. 레온 왕국의 산차 2세, 카스티야 왕국의 산초 3세,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알폰소 7세, 산초 4세, 엔리케 2세와 그의 아내 후아나 마누엘, 후안 1세, 엔리케 3세와 그의 아내 랭커스터의 캐서린, 후안 2세가 그들이다. 산초 2세 또한 톨레도 대성당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왕국 | 군주 | 비고 |
---|---|---|
레온 왕국 | 산차 2세 | 1230년 사망 |
카스티야 왕국 | 산초 3세 | 1157–1158, 주 제단 |
카스티야-레온 왕국 | 알폰소 7세 황제 | 1126–1157, 주 제단 |
산초 4세 용감왕 | 1284–1295, 주 제단 | |
엔리케 2세, 후아나 마누엘 | 1369-1379, 신 군주 예배당 | |
후안 1세 | 1379-1390, 신 군주 예배당 | |
엔리케 3세 병약왕, 랭커스터의 캐서린 | 1390–1406, 신 군주 예배당 | |
카스티야-레온 왕국 | 후안 2세 | 1406-1454, 신 군주 예배당, 가묘 |
포르투갈 왕국 | 산초 2세 경건왕 | 1223–1248, 역사적 추정 |
2. 1. 기원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현재 톨레도 대성당이 있는 자리에는 초대 대주교 에우제니오 시대의 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이 교회는 587년에 개조 공사를 거친 후 두 번째로 봉헌되었는데, 16세기에 교회 본당 뒤쪽 기둥에 보존된 비문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톨레도는 서고트 스페인의 주교 관할 구역이었다. 수많은 톨레도 공의회는 이 도시의 중요한 교회 역사를 증명한다. 또한, 레카레드의 아리우스파 포기도 이곳에서 일어났다. 무슬림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즉시 사라지지 않았고, 주교 관할 구역은 알피센(Alfizén)의 성 마리아 교회에 계속 자리 잡고 있었다.
서고트족 교회는 철거되었고, 톨레도 시의 주요 모스크가 그 자리에 세워졌다. 일부 연구자들은 모스크의 기도실이 현재 대성당의 5개 본당 레이아웃과 일치한다고 지적한다. ''사안(sahn)''은 현재 회랑의 일부, 성 베드로 예배당과 일치하며, 미나렛은 종탑과 일치한다. 특정 고고학 데이터를 사용하여 성 루치아 예배당 내에 설치된 이슬람 기둥을 식별할 수 있다. 성가대 외부를 장식하는 대리석 기둥은 오래된 무슬림 건축물을 개선한 것이며, 주 제단과 회랑의 트라이포리움에 있는 칼리프 양식의 얽힌 아치는 코르도바의 무슬림 건축 전통과 일치한다.
2. 2. 알폰소 6세 시대의 대성당
알폰소 6세가 1085년 톨레도를 재정복했을 때, 무슬림과의 항복 조항에는 무슬림의 종교와 문화를 존중하겠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었다.[7] 주요 모스크를 보존하는 것은 이 약속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얼마 후 알폰소 6세는 국정으로 도시를 떠났고, 그의 아내 콘스탄스와 사군 수도원장이자 톨레도 대주교로 승격된 베르나르도 데 세디라크(혹은 클뤼니의 베르나르)가 도시를 관리하게 되었다.1087년 10월 25일, 대주교 베르나르도는 콘스탄스 여왕과 협력하여 무력으로 모스크를 점령했다.[7] 그들은 임시 제단을 설치하고 종탑에 종을 걸었다. 마리아나 신부는 알폰소 6세가 이 사건에 격분하여 관련자들을 처형하려 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지역 무슬림 주민들의 지도자인 파키 아부 왈리드가 왕에게 자비를 요청하고, 주민들에게 기독교의 점령을 받아들일 것을 설득하여 사태를 진정시켰다.[8] 대성당 참사회는 왈리드에게 감사를 표하고 그의 조각상을 주 예배당 기둥에 놓아 그의 기억을 기렸다.[8]
이후 톨레도 모스크는 기독교 대성당으로 바뀌었다. 전 모스크의 건축 계획은 남아있지 않지만, 세비야, 하이엔 등 다른 스페인 도시의 모스크 유물을 통해 말굽 모양의 아케이드가 있는 기둥형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알폰소 6세는 새로운 교회에 많은 기증을 했다. 1086년 12월 18일, 대성당은 마리아의 보호 아래 놓였고, 여러 수입원을 부여받았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88년 이 교회를 스페인 왕국의 수석 대성당으로 인정했다. 모스크-대성당은 13세기까지 유지되었으며, 1222년 교황의 교황 칙서에 의해 새로운 대성당 건설이 승인되었다.
2. 3. 히메네스 데 라다 대주교 시대의 대성당
로드리고 히메네스 데 라다 대주교는 톨레도 관구의 수위권을 옹호하며 자신이 다스리는 도시에 걸맞은 웅장한 대성당을 짓고자 했다. 당시 모스크-대성당은 공간은 넓었지만 지붕이 낮아 내부가 시끄럽고 낡았으며, 다른 종교 건축물에 비해 날씬함과 높이가 부족했다. 이에 히메네스 데 라다는 현대적인 고딕 건축 양식으로 새로운 대성당을 건설하는 것을 적극 추진했다. 그는 이 프로젝트에 매우 열정적이었고, 대성당의 설계 건축가라는 잘못된 소문이 돌 정도였다. 대주교는 몇 년 동안 낡은 구조물을 유지하고 보강하며 새로운 대성당 건설을 준비했다.3. 건축
톨레도 대성당은 13세기 프랑스 고딕 양식의 영향을 받았지만, 스페인 취향에 맞춰 건설되었다.[9] 건물은 길이 120m, 너비 59m, 높이 44.5m이며, 트란셉트와 이중 회랑이 있는 5개의 선실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오래된 부분은 성소이고, 이곳에는 5개 선실 평면에 상응하는 이중 회랑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차례 개조되어 일부 예배당 배치가 변경되었다.
16~18세기에는 새로운 양식에 맞춰 대성당에 다양한 수정 작업이 이루어졌다. 웅장한 문과 예배당을 비롯한 건축물, 조각과 회화 작품들이 그 예이다. 16세기는 톨레도의 황금기로, "제국의 도시"라고 불렸다.
추기경 멘도사는 대성당 마지막 궁륭 폐쇄를 감독했으며, 영묘가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설되었다. 추기경 시스네로스는 22년간 추기경으로 재임하며 중요한 작품들을 만들었는데, 후안 프랑세스, 엔리케 에가스, 후안 데 보르고냐, 페드로 데 구미엘 등이 참여했다.
주교 후안 타베라 재임 시 톨레도 르네상스는 절정에 달했다. 알론소 베루게테와 펠리페 비가르니의 성가대, 트랜셉트 내부 파사드, 성 요한 또는 보물 예배당 등이 건설되었다. 대주교 후안 마르티네스 실리세오 재임 기간에는 프란시스코 데 비야르판도가 제작한 주 예배당 스크린으로 장식되었다.
추기경 가스파르 데 키로가는 성막 예배당, 유물실, 재무관 안뜰과 집으로 이루어진 건축 단지를 담당했으며, 니콜라스 데 베르가라 엘 모소가 설계했다. 이 단지 건설을 위해 왕립 병원이 철거되어 이전 부지에 재건되었고, 17세기에 추기경 베르나르도 데 산도발 이 로하스와 건축가 니콜라스 데 베르가라의 감독 하에 수행되었다.
3. 1. 건물 개요
톨레도 대성당은 길이 120m, 너비 59m, 높이 44.5m의 건물이다. 트란셉트와 이중 회랑이 있는 5개의 선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바깥쪽 선실이 다른 두 선실보다 약간 더 넓은 것이 특징이다.[9] 건물에서 가장 오래된 부분은 성소로, 이곳에는 원래 선실 길이를 따라 뻗어 있던 트리포리아가 있었으나, 여러 차례 개조를 거치면서 제거되었다. 현재 성소에 남아 있는 트리포리아는 무데하르 양식의 영향을 받았는데, 가장 낮은 부분은 쌍을 이룬 기둥에 놓인 아치로, 윗부분은 무데하르 양식 특유의 얽힌 아치로 구성되어 있다.[9]성소에는 5개 선실 평면에 상응하는 이중 회랑이 있는데, 웅장한 비율과 함께 건축 요소와 독창적인 볼트로 장식되어 있다. 예배당들은 직사각형과 삼각형 평면이 번갈아 나타나는 형태로 배치되어, 각 예배당의 크기가 달라지는 특징을 보인다.[9] 이러한 성소 분배 방식은 파리, 부르주, 르망 등 프랑스 대성당에서 볼 수 있다. 특히 르망 대성당과 외관이 가장 유사하지만, 스페인의 톨레도 대성당은 이들보다 더 육중한 모습을 하고 있다.[9] 시간이 지나면서 이루어진 다양한 개조로 인해 일부 예배당의 배치가 변경되기도 했다. 선실의 볼트는 4분 볼트이며, 트란셉트와 성가대석의 볼트는 티어세론으로 보강되었다.
톨레도 대성당의 건물 구조는 13세기 프랑스 고딕 양식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스페인 취향에 맞춰 적용되었다.[9]
3. 2. 주요 건축가 및 후원자
로드리고 히메네스 데 라다 대주교는 13세기에 톨레도 대성당의 현재 모습을 구상하고 추진한 인물이다. 그는 톨레도 관구의 수위권을 옹호하며 도시에 걸맞은 웅장한 대성당을 짓고자 했다. 당시 모스크-대성당은 공간은 넓었지만 지붕이 낮고 낡았으며, 히메네스 데 라다는 고딕 건축 양식의 새로운 대성당 건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9]대성당의 초대 건축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페트루스 페트리(스페인어: ''페드로 페레즈'')로 알려져 있었으나, 20세기 중반에 새로운 문서들이 발견되면서 프랑스 출신의 마스터 마르틴이 초대 건축가로 밝혀졌다. 마스터 마르틴은 주변 회랑의 예배당을 설계했으며, 그의 사후 마스터 페트루스가 주변 회랑을 완성하고 톨레도 양식의 트리포리아를 건설했다.[9]
14세기 말에는 마스터 로드리고 알폰소가 수도원 건설에 참여했고, 15세기 초에는 알바르 마르티네스가 서쪽 파사드와 대성당의 유일한 탑을 설계했다. 탑의 꼭대기 부분은 플레밍 하네킨 데 브루셀라스가 완성했으며, 에가스 쿠에만, 엔리케 에가스, 후안 구아스 등 뛰어난 장인들이 함께 작업했다.
건축가 | 주요 역할 및 기여 | 후원자 |
---|---|---|
로드리고 히메네스 데 라다 | 대성당 건설 추진 및 초기 구상 | (본인) |
마스터 마르틴 | 초대 건축가, 주변 회랑 예배당 설계 | 로드리고 히메네스 데 라다 |
페트루스 페트리 | 주변 회랑 완성, 트리포리아 건설 | 로드리고 히메네스 데 라다 |
로드리고 알폰소 | 수도원 건설 참여 (14세기 말) | 페드로 테노리오 |
알바르 마르티네스 | 서쪽 파사드 및 탑 설계 (15세기 초) | 후안 마르티네스 데 콘트레라스 |
하네킨 데 브루셀라스 | 탑 꼭대기 부분 완성 | 후안 데 세레주엘라, 추기경 멘도사 |
에가스 쿠에만, 엔리케 에가스, 후안 구아스 | 파사드, 예배당 등 고딕 양식 완성 | 후안 데 세레주엘라, 추기경 멘도사 |
페드로 테노리오 대주교는 수도원의 성 블레이즈 예배당 건설을 후원했으며, 추기경 멘도사는 중앙 본당 발치의 아치 건설을 후원하고 감독했다.
4. 외부
톨레도 대성당의 외부는 주 정면, 여러 개의 문, 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 정면은 시청과 대주교 궁이 있는 불규칙한 광장을 마주보고 있으며, 왼쪽에는 종탑, 오른쪽에는 무자라브 예배당이 있다. 주 정면에는 '용서의 문'(중앙), '최후의 심판의 문'(오른쪽), '지옥의 문'(왼쪽)의 세 문이 있다. 왼쪽에는 대성당의 유일한 탑이, 오른쪽에는 시스네로스 추기경이 의뢰한 무자라브 예배당의 돔이 있다. 탑은 알바르 마르티네스가 설계한 사각형 하단부와 하네퀸 드 브뤼셀이 설계한 팔각형 상단부로 나뉜다.
1787년, 건축가 에우제니오 두랑고와 조각가 마리아노 살바티에라가 석재 손상으로 인해 주 정면을 수정했다.
'시계의 문'은 북쪽 면 정면에 위치한 가장 오래된 문(14세기)이다. '사자의 문'은 15, 16세기에 건설된 가장 현대적인 문으로, 기둥 위 사자 조각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레벨 포털'은 계단 없이 지면과 같은 높이에 있는 유일한 입구(1800년)이다. ''성 카타리나 파사드''는 후기 고딕 양식이며, 후안 타베라 추기경 시대의 ''프레젠테이션의 문''이 있다.
4. 1. 주 정면과 주요 문

톨레도 대성당의 주 정면에는 세 개의 큰 문이 있다. 중앙의 '''용서의 문'''(Puerta del Perdón), 오른쪽의 '''최후의 심판의 문'''(Puerta del Juicio Final), 왼쪽의 '''지옥의 문'''(Puerta del Infierno)이다.
- '''용서의 문'''은 15세기(1418년)에 건설이 시작되었다. 이 문을 통해 들어온 참회자들에게 면죄부가 주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현재는 특별한 경우나 새 대주교 임명 시에만 열린다. 뮬리온에는 구세주의 모습, 문설주에는 사도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팀파눔에는 성모 마리아가 성 일데폰수스에게 카소블을 주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톨레도 대성당에서 자주 보이는 주제이다. 문의 5미터가 넘는 잎은 14세기에 제작된 정교한 청동판으로 덮여 있다.[13]
- '''최후의 심판의 문'''은 세 문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이름처럼 최후의 심판을 묘사하고 있다.
- '''지옥의 문'''은 인물 조각 없이 꽃 장식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종려 주일 행렬이 드나드는 문이었기 때문에 '탑의 문' 또는 '야자수의 문'으로도 불린다.
1787년, 건축가 에우제니오 두랑고와 조각가 마리아노 살바티에라는 주 정면을 수정했다. 이는 석재의 손상 때문이었다.[14]
4. 1. 1. 시계의 문
'시계의 문'은 14세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북쪽 면 정면에 위치한 가장 오래된 문이다. 이 문은 다음과 같은 여러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축제의 문''': 축제가 열리던 거리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 '''차피네리아(신발 가게)의 문''': 나막신이 만들어지고 판매되던 거리에 면해 있기 때문이다.
- '''오야스의 문''': 장식에서 몇 개의 오야스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군주의 문''': 조각의 도상학을 따른 이름이다.
- '''잃어버린 소년의 문''': 이 또한 도상학에 따른 이름이다.
고막은 4개의 수평 패널로 나뉘며,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생애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고막 상단에는 성모 승천이 묘사되어 있다. 뮬리언 기둥은 성모와 아기 예수의 이미지로 장식되어 있다. 문설주에는 왕과 성인의 이미지가 있으며, 모두 사자문의 작업에도 참여한 조각가 후안 알레만의 작품이다.
이 문 위에는 그레고리오 로페스 듀랑고의 후기 조각이 있는데, 그의 작품은 정면에서도 볼 수 있다. 이는 돌의 열화된 상태 때문에 필요했던 보강 작업이었다. 문 위 중앙 간주간은 시계판이 차지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이 문은 시계의 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문과 주변 석조물은 고딕식 스크린으로 둘러싸인 입구와 함께 매력적인 공간을 형성한다. 이는 후안 프란세스의 작품으로, 매우 단순한 가로대, 중앙에 분리된 작은 조각 프리즈, 단순하고 조화로운 디자인을 특징으로 한다.
'''내부'''
내부에는 다양한 메달이 있다. 가장 훌륭한 것은 니콜라스 데 베르가라 엘 모조의 수태고지 성모와 후안 바우티스타 바스케스의 대천사 성 가브리엘의 메달이다. 또한 그림과 문장으로 장식되어 있다. 위에는 대성당에서 가장 오래된 스테인드글라스가 들어 있는 13세기의 장미 창이 있다.
4. 1. 2. 사자의 문
사자의 문은 15세기와 16세기에 걸쳐 건설된 문으로, 문의 기둥 위에 사자가 있어 이러한 이름이 붙었다. 가장 마지막에 지어졌기 때문에 '새로운 문'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후벽 아치볼트에 묘사된 성모 승천 축제를 가리키는 '환희의 문'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1460년에서 1466년 사이에 아르헨티나 알폰소 카리요 데 아쿠냐의 지시 아래, 브뤼셀의 하네킨(아네킨 데 에가스 쿠에만),[13]과 그의 아들 엔리케 데 에가스 쿠에만[14]이 설계하였다. 플랑드르 조각가 페드로와 후안 구아스, 사도 조각가 후안 알레만도 함께 참여했다.
이 문의 조각상은 15세기의 가장 훌륭한 스페인-플랑드르 양식의 집합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특히 기둥-분할대 성모상과 문설주의 조각상이 뛰어나다. 하늘로 승천하는 마리아를 묘사한 천사들과 음악 천사들은 매우 섬세하게 제작되었다. 문의 청동 잎은 프란시스코 데 비야르판도의 작품으로, 35개의 패널로 구성되어 있다. 이 청동 잎은 나무 패널로 보호되어 있으며, 그 위에는 다색 스테인드 글라스로 된 거대한 장미 창이 있다.
문의 내부는 남쪽 측면의 횡단면 정면과 일치하며, 황제의 오르간이 있는 갤러리에 해당하는 난간이 있는 작은 발코니가 있다. 더 위에는 펜던티브가 있는 액자로 둘러싸인 장미 창이 있다.
거대한 정면의 하단에는 기둥-분할대로 나뉜 문이 있으며, 문 위에는 성모의 계보를 주제로 한 팀파눔이 있다. 팀파눔 위에는 성모 대관식의 커다란 메달리온이 있는 플라테레스크 조각이 있는데, 이는 그레고리오 파르도(필리페 비가르니의 장남)의 작품이다. 양쪽에는 다윗과 솔로몬의 조각상이 있으며, 이는 에스테반 하메테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정면의 오른쪽과 왼쪽에 두 개의 무덤이 있다. 오른쪽 무덤은 비어 있고, 왼쪽 무덤에는 알폰소 데 로하스 대성당 사제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청동 ''레하''(금속 세공 스크린)는 1647년 우베다 (하엔) 출신의 후안 알바레스 데 몰리나가 제작했다.
4. 2. 기타 문과 파사드

- '''레벨 포털'''(평탄의 문)은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1800년에 지어졌다. 계단 없이 지면과 같은 높이에 있는 대성당의 유일한 입구이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으며, 행렬이 이 포털을 통해 나가는 것이 관례였다.[1]
- '''성 카타리나 파사드'''는 후기 고딕 양식이다.[1] 그 아키볼트는 잎과 잎의 식물 모티프로 조각되어 있다.[1] 멀리언을 이루는 기둥은 측면에 성과 사자가 새겨져 훌륭하게 조각되어 있다.[1] 내부에는 두 개의 구역이 있는데, 높은 구역은 작은 배면판이 있는 일련의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다.[1]
- '''프레젠테이션의 문'''은 후안 타베라 추기경 시대의 작품으로, 훌륭한 품질의 매우 흰색 석재로 만들어졌으며, 미니어처 이미지로 풍부하게 조각되어 있다.[1]
4. 3. 탑
원래 계획은 서쪽 파사드의 양쪽에 두 개의 대칭적인 탑을 건설하는 것이었으나, 북쪽 모서리에 있는 탑을 세웠을 때 남쪽 탑을 건설하기로 계획되었던 부지 아래의 지반이 지하수 때문에 불안정하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그곳에 무데하르 예배당이 건설되었다.[10]
탑은 알바르 마르티네스가 설계하고 주로 건설했으며, 고딕 양식에 일부 장식적인 무데하르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높이는 92m에 달한다. 재무 예배당이 있는 사각형의 높은 기단 위에 4개의 층과 5번째 층이 솟아 있다. 첫 번째 층과 두 번째 층 사이에는 후안 마르티네스 데 콘트레라스 대주교(1422년부터 1438년까지 재임)의 문장이 흰색 대리석으로 상감된 검은색 대리석 프리즈가 수평으로 펼쳐져 있다. 마스터 마르티네스는 1422년에 이 부분을 완성했지만 첨탑과 첨탑의 건설 계획이나 도면은 남기지 않았다. 팔각형 몸체를 가진 탑의 이 최고층은 건축가 하네킨 드 브뤼셀라스가 설계했으며, 그는 에가스 쿠에만, 엔리케 에가스, 후안 구아스 등 뛰어난 장인 그룹과 함께 건설을 마무리하기 위해 소환되었다. 부벽 아치가 있는 첨탑은 다섯 번째 층의 팔각형 통에 놓여 있으며, 교황 삼중관을 모방한 세 개의 왕관을 지지하는 첨탑으로 덮여 있다.
5. 내부
톨레도 대성당 내부는 13세기 프랑스 고딕 양식의 영향을 받았지만, 스페인 취향에 맞춰 적용되었다. 건물은 길이 120m, 너비 59m, 높이 44.5m이며, 트란셉트와 이중 회랑이 있는 5개의 선실로 구성되어 있다. 바깥쪽 선실은 다른 두 선실보다 약간 넓다.
가장 오래된 부분은 성소로, 원래 선실 길이를 따라 뻗어 있던 트리포리아가 있었으나, 여러 차례 개조되면서 제거되고 대형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대체되었다. 성소에 남아 있는 트리포리아는 무데하르 양식의 영향을 받았으며, 가장 낮은 부분은 쌍을 이룬 기둥에 놓인 아치로, 윗부분은 얽힌 아치로 구성되어 있다.
성소에서는 5개 선실 평면도에 상응하는 이중 회랑을 볼 수 있다. 이 회랑은 웅장하며 건축 요소와 독창적인 볼트로 장식되어 있다. 예배당의 새로운 구획은 직사각형과 삼각형 평면이 번갈아 나타나는 방식으로 해결되었으며, 각 예배당 크기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러한 방식은 파리, 부르주, 르망 등 프랑스 대성당에서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예배당 배치가 변경되기도 했다.
선실의 볼트는 트란셉트와 성가대석의 볼트가 티어세론으로 보강된 것을 제외하고는 4분 볼트이다.
수세기 동안 톨레도 대성당의 초대 건축가장은 페트루스 페트리(스페인어: ''페드로 페레즈'')로 알려졌으나, 20세기 중반 시우다드 레알 주교가 공개한 문서에 따르면 프랑스 출신 마스터 마르틴이 초대 건축가로 인정받고 있다. 14세기 말에는 로드리고 알폰소, 알바르 마르티네스 등이 참여했고, 16~18세기에는 새로운 양식에 맞춰 다양한 수정 작업이 이루어졌다. 16세기는 톨레도의 황금기로, 추기경 시스네로스 등 후원 아래 중요한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기예르모 드 크로이, 알론소 데 폰세카 이 아세베도 등도 대성당 건축에 기여했다.
후안 타베라 주교 부임과 함께 톨레도 르네상스는 절정에 달했고, 알론소 베루게테, 펠리페 비가르니, 후안 마르티네스 실리세오, 가스파르 데 키로가 등이 건축과 장식에 참여했다.
주 제단 아래에는 지하 묘소 형태의 성묘 예배당이 있다. 사제관 외부 스크린과 정문을 거쳐 계단을 내려가면 나오는 아치형 예배당으로, 세 개의 제단이 있다. 중앙 제단은 예수 성묘에 봉헌되었고 코핀 데 홀란다 조각상이 있으며, 오른쪽 제단에는 루이스 메디나와 프란시스코 리치 그림이, 왼쪽 제단에는 성 율리아노 봉헌 제단과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주제의 이탈리아 패널이 있다.
톨레도 대성당 제단벽은 매우 화려한 고딕 양식 제단화로, 시스네로스 추기경 의뢰로 1497년 시작, 1504년 완성되었다. 엔리케 에가스, 페드로 구미엘, 프란시스코 데 암베레스, 후안 데 보르고냐 등 여러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중앙 패널이 가장 넓은 5개 연속 패널, 5층 높이로 구성되며, 프레델라에 은도금 성모와 아기, 성체 보관함, 나무 조각 고딕 양식 성광, 탄생, 승천, 갈바리아 십자가 책형 묘사 등 주제가 아래에서 위로 이어진다.
카르디날 멘도사 묘는 1493년 그가 직접 지시한 대로 대성당에 위치했다. 수도원 참사회는 군주 특권 공간인 성가대석 위치를 반대했지만, 결국 이사벨 여왕 등 카톨릭 군주들의 옹호로 성가대석 구조 변경 및 왕족 무덤 이전 후 수용되었다.
로드리고 히메네스 데 라다 프로젝트에 따라 구상된 주요 및 부속 예배당들은 원래 성당 성소를 둘러쌌으나, 일부 제거, 확장, 재정비되었다.
5. 1. 주요 예배당
알폰소 6세가 1085년 톨레도를 재정복한 후, 모스크였던 건물을 기독교 대성당으로 바꾸었다.[7] 이슬람교도들은 무혈 항복 조건으로 종교와 관습을 존중받기로 약속받았고, 주요 모스크 보존도 그 약속의 일부였다. 그러나 알폰소 6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왕비 콘스탄스와 대주교 베르나르도는 무력으로 모스크를 점령하고 기독교식으로 개조했다.[7] 이에 격분한 알폰소 6세는 관련자들을 처형하려 했으나, 무슬림 지도자 파키 아부 왈리드의 중재로 평화를 되찾았다. 왈리드의 관용에 대한 감사로 대성당 참사회는 그의 조각상을 주 예배당 기둥에 세웠다.[8]이후 알폰소 6세는 성모 마리아께 대성당을 봉헌하고,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88년 톨레도 대성당을 수석 대성당으로 인정했다. 13세기에 페르난도 3세와 로드리고 히메네스 데 라다 대주교의 주도로 새로운 고딕 양식 대성당 건설이 시작되었다.


현재 대성당의 기본 구조는 13세기 프랑스 고딕 양식의 영향을 받았지만, 스페인식으로 변형되었다. 건물은 길이 120m, 너비 59m, 높이 44.5m이며, 5개의 신랑과 이중 회랑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오래된 부분은 성소이며, 무데하르 양식의 트리포리아가 남아 있다.
초대 건축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었으나, 현재는 프랑스 출신의 마스터 마르틴이 초기 설계를 맡았고, 이후 마스터 페트루스가 그의 작업을 이어받아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9] 14세기 말에는 로드리고 알폰소가 수도원 건설에 참여했고, 이후 알바르 마르티네스가 서쪽 파사드와 탑을 설계했다.

주요 예배당은 원래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시스네로스 추기경의 주도로 재건축되어 넓은 공간과 웅장한 후진을 갖추게 되었다. 예배당 측면에는 석조 스크린이 있는데, 이는 대성당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15] 이 스크린에는 페드로 데 루나 대주교 시대에 제작된 다색 방패와 카스티야-레온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예배당 내부 통로에는 마르틴 알라하와 아부 왈리드의 조각상이 있는 기둥이 있다.
성소에는 알폰소 7세, 베렌겔라, 산초 3세, 산초 4세의 묘소가 있으며, 그들의 조각상은 코핀 데 홀란다가 나무로 조각하고 프란시스코 데 암베레스가 채색했다.

제단벽은 매우 화려한 고딕 양식의 제단화로, 시스네로스 추기경의 의뢰로 1497년부터 1504년까지 제작되었다.[16] 엔리케 에가스, 페드로 구미엘, 프란시스코 데 암베레스, 후안 데 보르고냐, 로리고 알레만 등 여러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중앙 패널은 5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프레델라의 성모와 아기 예수 좌상부터 시작하여, 성체 보관함, 예수 탄생, 승천, 십자가 책형 장면 등이 묘사되어 있다.
5. 1. 1. 성묘 예배당
주 제단 아래에는 지하 묘소 형태의 성묘 예배당이 있다. 사제관 외부에서 스크린과 정문을 거쳐 계단을 내려가면 들어갈 수 있다. 이곳은 아치형 예배당으로, 세 개의 제단이 있다. 중앙 제단은 예수 성묘에 봉헌되었으며, 코핀 데 홀란다가 조각한 조각상이 있다. 오른쪽 제단에는 루이스 메디나와 프란시스코 리치의 중요한 그림이 걸려 있다. 왼쪽 제단은 성 율리아노에 봉헌되었으며, 대주교 조각상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를 주제로 한 이탈리아 패널 두 점이 있다.5. 1. 2. 제단화
톨레도 대성당의 제단벽은 매우 화려한 고딕 양식으로, 르네상스 양식이 스페인에 들어오면서 점차 사라져가던 고딕 양식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 중 하나이다. 시스네로스 추기경의 의뢰로 1497년에 제작이 시작되어 1504년에 완성되었다.[16]
이 거대한 제단화 제작에는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이 참여했다. 엔리케 에가스와 페드로 구미엘이 설계를 맡았고, 프란시스코 데 암베레스와 후안 데 보르고냐는 나무 조각에 금박을 입히고 다색 채색을 하는 에스토파도 기법을 담당했다.[16] 로리고 알레만, 필리페 비가르니, 디에고 코핀 데 홀란다, 세바스티안 데 알모나시드는 종교적인 이미지를 조각했으며, 호안 페티는 조각과 세공 작업을 맡았다.[16]
제단벽은 제단 위로 높이 솟아 있으며, 호안 페티가 제작한 정교한 조각상, 난간, 첨탑, 작은 도살, 창문틀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중앙 패널이 가장 넓고, 5개의 패널이 연속적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5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 패널은 아래에서 위로 다음과 같은 주제를 담고 있다.
- 프레델라에는 은으로 도금된 성모와 아기 예수의 좌상이 있다.
- 그 위에는 성체 보관함과 나무로 조각된 고딕 양식의 성광이 있다.
- 그 위에는 예수 탄생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 그 위에는 예수 승천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 맨 위에는 갈바리아에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이 웅장하게 펼쳐져 있다.
다른 패널들에는 예수의 삶과 수난에 대한 다양한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16]
5. 1. 3. 멘도사 추기경의 묘
카르디날 멘도사의 묘는 1493년 그가 지시한 대로 톨레도 대성당에 위치해 있다.[1] 수도원 참사회는 처음에 묘가 성가대석에 위치하는 것을 반대했는데, 그곳은 군주들의 특권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성가대석 구조를 변경하고 왕족 무덤을 옮겨 묘를 수용해야 했다.[1] 최종 결정에서 참사회는 이사벨 여왕이 "추기경의 세 가지 아름다운 죄(그의 자녀)"라고 불렀던 자들이 수행한 귀중한 공헌을 언급하며 카톨릭 군주들이 카르디날을 옹호하며 개인적으로 개입한 것에 따랐다.[1] 1495년 1월 11일 과달라하라에서 그가 사망했을 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사후 평판에 성스러움을 부여하려는 시도로 보이는, 반짝이는 흰 십자가를 보았다고 한다.[1]카르디날 멘도사의 묘는 최초의 카스티야 르네상스식 묘였다.[2] 구조는 중앙에 열린 아치 하나와 두 개의 작은 아치로 구성되어 있으며, 두 개의 정면에 조각되어 있어 로마 개선문의 모델을 따라 내부와 외부에서 묘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당시 건축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그 웅장한 형태와 당시까지 확립된 양식이었던 고딕 양식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었다.[2] 이 작품의 저자는 불분명하지만, 나중에 포르투갈 궁정에서 비슷한 스타일로 작업한 피렌체 출신 야코포 다 안토니오 산소비노에게 귀속된다.[2]
이 묘는 이후 다른 작품들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3] 포르투갈의 파드리카, 페드로 로페스 데 아얄라 또는 페르난도 데 아르세의 묘는 이 새로운 모델의 부분적인 모방작이었다.[3]
5. 2. 내부 예배당 개요
톨레도 대성당 내부는 여러 예배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오랜 시간에 걸쳐 구조와 용도가 변화해 왔다. 원래 성소를 둘러싸고 있던 주요 예배당과 부속 예배당들은 일부 제거, 확장, 재정비되었다.[15] 13세기에 지어진 예배당 중 일부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지만, 14세기와 15세기에 회랑의 예배당들이 묘지 예배당으로 바뀌는 등 큰 변화를 겪었다.초기 예배당 중 성 요한 세례자 예배당과 성 레오카디아 예배당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구 군주 예배당과 성 루치아 예배당은 장식이 변경되었다. 특히 성 루치아 예배당은 오래된 모스크의 기둥과 기둥 머리 등 유적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이다.[15]
시간이 지나면서 성 에우제니오 예배당, 성 블레이즈 예배당, 성 베드로 예배당, 신 군주 예배당 등이 추가되거나 개조되었다. 성 에우제니오 예배당은 13세기 건축 양식을 유지하고 있으며, 성 베드로 예배당은 교구 예배당으로 사용될 만큼 규모가 크다.
이후 건축가들은 성소에서 벽 쪽으로 예배당을 배치하는 방식을 따랐는데, 이로 인해 현재 예배당 배치는 초기 설계와 비교했을 때 다소 복잡해졌다.
5. 2. 1. 모사라베 예배당

'''모사라베 예배당'''은 톨레도 대성당 남동쪽 모서리에 있으며, 건설되지 않은 두 번째 탑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 1500년 시스네로스 추기경은 이 예배당을 '성체 예배당'이라 명명하고, 히스파노-무사라베 전례를 따르는 신자들을 위한 예배 공간으로 지정했다.[16]
1101년 3월 20일, 알폰소 6세는 톨레도의 무사라베들에게 조공을 바치는 대가로 특권을 주었고, 1371년 카스티야의 엔리케 2세는 이 특권을 재확인했다. 시스네로스는 예배당을 세우면서 무사라베 전례서, 성무일과, 미사 경본을 복원하고 다시 발행하도록 장려했다. 이는 신자들의 일부를 달래기 위한 의도로 보이며, 예배당 건축을 위해 대성당 참사회에 3800플로린이라는 큰 금액을 지불한 기록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이 거액은 지역 사회의 후원이 있었음을 보여준다.[16] 현재도 이 예배당에서는 무사라베 전례 예배가 계속되고 있다.
예배당은 팔각형 돔 아래 사각형 평면으로 설계되었다. 원래 무사라베 양식의 coffered ceiling(천장 장식)은 1620년 화재나 이후 개조로 인해 사라졌다. 현재의 돔은 17세기에 엘 그레코의 아들 호르헤 마누엘 테오토코풀리가 설계한 것으로, 8개의 부분과 큰 지붕 등불 돔을 가지고 있다. 예배당 내부에는 시스네로스 추기경이 후안 데 보르고냐에게 오란 정복을 묘사하도록 의뢰한 그림이 있다.[16]
후안 프랑세스가 1524년에 제작한 고딕 양식의 철제 세공 스크린에는 시스네로스 추기경의 문장이 장식되어 있다. 18세기에 제작된 모자이크 십자가는 로마에서 가져온 것으로, 배가 난파되어 바다 밑에 가라앉았다가 인양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십자가는 멕시코 회향 뿌리로 조각된 단일 조각이다. 성가대석과 예배당을 분리하는 또 다른 고딕 로즈 스크린은 톨레도의 훌리오 파스쿠알이 제작했다.[16]
5. 2. 2. 새로운 군주들의 예배당

새로운 군주들의 예배당이라는 이름은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새로운 왕조를 지칭한다. 현재 예배당은 성 야고보 예배당과 성 레오카디아 예배당 북쪽에 있으며, 성소의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알론소 데 코바루비아스가 설계한 독특하고 접근하기 어려운 입구를 가지고 있다. 원래 이 예배당은 왕실 예배당이라고 불렸으며, 북쪽 측랑(복음 설교단 쪽)의 대성당 발치에 위치하여 본당 끝으로의 통행을 막았다. 예배당 참사회는 본당을 정리하기 위해 이 예배당의 위치를 변경하고자 했고, 대주교 알론소 데 폰세카 이 아세베도는 국왕에게 위치 변경 허가를 요청했다. 적합한 부지를 찾는 것이 어려웠으나, 결국 코바루비아스의 노력으로 해결되었다.
이 예배당은 작은 교회라고 볼 수 있으며, 코바루비아스의 원래 설계에 따라 두 구획과 다각형 앱스를 가진 단일 본당, 성구실 및 입구 현관을 포함한다. 1531년에서 1534년 사이에 건설되었으며, 톨레도에서 코바루비아스가 수행한 첫 번째 대규모 작업이다.
본당의 두 구획은 고딕 양식의 교차 볼트를 가지고 있지만, 묘의 모든 장식과 조각은 르네상스 양식이다. 이들은 도밍고 데 세스페데스의 작품인 스크린으로 분리되어 있다. 첫 번째 구획은 일부 제단이 있는 작은 교회의 본체를 형성하고, 두 번째 구획에는 코바루비아스의 작품인 르네상스 볼트 무덤에 이전된 왕실 묘가 있다. 한쪽에는 엔리케 2세와 그의 아내 후아나 마누엘이 있으며, 그 앞에는 석관에 누워 있는 엔리케 3세와 랭커스터의 캐서린이 있다.
성가대석으로 들어가는 아치에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작은 제단 두 개가 있다. 주 제단은 마테오 메디나의 작품이다. 강림을 주제로 한 마엘라의 그림이 있으며, 두 개의 코린트식 기둥으로 틀이 잡혀 있다. 이 제단의 양쪽에는 카스티야의 후안 1세와 그의 아내 아라곤의 엘레오노르의 각각 기도하는 조각상이 있는 무덤이 있다.
1476년 토로 전투에서 양팔을 잃고 가톨릭 군주들의 군대에 포로로 잡힌 부관 두아르테 데 알메이다의 갑옷은 역사적 기념물로서 이 예배당에 보관되어 있다.[24]
5. 3. 남쪽 벽 예배당
톨레도 대성당 남쪽 벽에는 주현절 예배당, 잉태 예배당, 성 마르틴 예배당, 성 에우제니오 예배당이 있다.
; 주현절 예배당
: 모사라베 예배당 옆에 있다. 1397년 페드로 페르난데스 데 부르고스와 그의 아내 마리아 페르난데스가 기증했다. 후안 데 보르고냐가 그린 동방 박사의 경배를 주제로 한 제단화가 있다.[18] 헨리 4세의 사제였던 루이스 다자(1504년 사망)가 복원했으며, 스크린은 후안 프란세스의 양식을 따랐다. 제단화 아래쪽에는 기증자의 초상화가 있다. 예배당 한쪽에는 루이스 다자의 무덤이 고딕 양식의 아르코솔리움 안에 있다. 성모 마리아의 생애, 그리스도의 수난, 최후의 심판을 묘사한 후안 데 보르고냐의 프레스코화도 있다.[18]
; 잉태 예배당
: 1502년 원장 후안 데 살세도가 건설 자금을 지원했다. 살세도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스크린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프란시스코 데 암베레스의 그림이 있는 제단화와 후원자의 무덤이 왼쪽에 있다.
; 성 마르틴 예배당
: 후안 프란세스가 만든 큰 스크린으로 둘러싸여 있다. 후안 데 보르고냐와 프란시스코 데 암베레스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제단화가 있으며, 가운데에는 성 투르의 마르틴이 묘사되어 있다. 제단 옆 아르코솔리움에는 성직자 토마스 곤잘레스 데 비야누에바와 후안 로페스 데 레온의 무덤이 있다.
; 성 에우제니오 예배당
: 13세기 건축 양식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으며, 이전에는 성 베드로 예배당으로 불렸다. 후안 프란세스가 서명한 스크린으로 둘러싸여 있고, 제단화에는 톨레도 대주교였던 성 에우제니오의 모습이 담겨있다. 1278년에 사망한 톨레도 재판관 페르난 구디엘의 무덤은 무데하르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하느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께"라는 아랍어 문구가 반복되는 처마 장식이 있다.
5. 4. 앰뷸러토리 예배당
톨레도 대성당의 앰뷸러토리(주 제단 뒤쪽의 통로)는 13세기 프랑스 고딕 양식의 영향을 받았지만, 스페인 양식에 맞게 변형되었다. 가장 오래된 부분은 성소이며, 원래 선실 길이를 따라 트리포리움(Triforium)이 있었으나, 여러 차례 개조되면서 제거되고 대형 스테인드글라스 창으로 대체되었다. 성소에 남아 있는 트리포리움은 무데하르 양식의 영향을 받았는데, 가장 낮은 부분은 쌍을 이룬 기둥에 놓인 아치로, 윗부분은 얽힌 아치로 구성되어 있다.
성소의 이중 회랑은 웅장하며, 건축 요소와 독창적인 볼트로 장식되어 있다. 예배당의 새로운 구획은 직사각형과 삼각형 평면이 번갈아 나타나는 방식으로 해결되었으며, 각 예배당의 크기가 다르게 나타난다. 이러한 방식은 파리, 부르주, 르망의 프랑스 대성당에서 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예배당의 배치가 변경되기도 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는 새로운 양식에 맞춰 대성당에 다양한 수정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웅장한 문과 예배당, 조각과 회화 작품들이 그 예이다. 16세기는 톨레도의 황금기였으며, 추기경 시스네로스 등의 후원 아래 중요한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기예르모 드 크로이와 알론소 데 폰세카 이 아세베도 등의 인물들도 대성당 건축에 기여했다.
주교 후안 타베라의 부임과 함께 톨레도 르네상스는 절정에 달했고, 알론소 베루게테, 펠리페 비가르니, 후안 마르티네스 실리세오, 가스파르 데 키로가 등의 인물들이 대성당의 건축과 장식에 참여했다.
로드리고 히메네스 데 라다의 프로젝트에 따라 구상된 주요 및 부속 예배당들은 원래 성당의 성소를 둘러싸고 있었다. 일부는 제거되거나 확장, 재정비되었으며, 부속 예배당 중에서는 성 안나와 성 길 예배당만 남아있다. 주요 예배당 중에서는 성 요한 세례자와 성 레오카디아 예배당이 초기 시대의 요소를 유지하고 있다. 14세기와 15세기에는 회랑의 여섯 개의 작은 예배당이 성 일데폰수스와 성 야고보의 묘지 예배당으로 바뀌는 등 큰 변화가 있었다. 기둥의 그리스도 예배당은 17세기 초에 학생들의 그리스도 예배당으로 바뀌었고, 성 바르바라, 성 니콜라스, 성 엘리자베스, 성 삼위일체 예배당은 다른 구조물에 통합되었다. 다양한 개조 이후, 구 군주, 성 요한 세례자, 성 레오카디아, 성 루치아, 성 에우제니오, 성 블레이즈, 성 베드로, 신 군주 예배당을 찾을 수 있다. 건축가들은 성당의 성소에서 벽 쪽으로 나아가는 기준을 따랐으며, 이는 초기 설계와 비교하여 현재의 레이아웃이 때때로 혼란스러운 이유를 설명한다.
'''신 군주들의 예배당'''
신 군주들의 예배당은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새로운 계통을 지칭한다. 현재 예배당은 성 야고보 예배당과 성 레오카디아 예배당 북쪽에 위치하며, 알론소 데 코바루비아스가 설계했다. 원래는 왕실 예배당이라고 불렸으며, 본당 끝으로의 통행을 막고 있었다. 예배당 참사회는 본당을 정리하기 위해 위치 변경을 요청했고, 결국 코바루비아스의 노력으로 해결되었다.
작은 교회와 같은 이 예배당은 두 구획과 다각형 앱스를 가진 단일 본당, 성구실 및 입구 현관을 포함하며, 1531년에서 1534년 사이에 건설되었다. 본당의 두 구획은 고딕 양식의 교차 볼트를 가지고 있지만, 묘의 모든 장식과 조각은 르네상스 양식이며, 도밍고 데 세스페데스의 작품인 스크린으로 분리되어 있다. 첫 번째 구획은 작은 교회의 본체를 형성하고, 두 번째 구획에는 코바루비아스의 작품인 르네상스 볼트 무덤에 이전된 왕실 묘가 놓여 있다. 한쪽에는 엔리케 2세와 그의 아내 후아나 마누엘이 있으며, 그 앞에는 엔리케 3세와 랭커스터의 캐서린이 있다.
성가대석으로 들어가는 아치에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작은 제단 두 개가 있고, 주 제단은 마테오 메디나의 작품이며, 마엘라의 그림이 있다. 이 제단의 양쪽에는 카스티야의 후안 1세와 그의 아내 아라곤의 엘레오노르의 무덤이 있다. 1476년 토로 전투에서 양팔을 잃은 부관 두아르테 데 알메이다의 갑옷이 이 예배당에 보관되어 있다.
'''성 야고보 예배당'''

알바로 데 루나의 예배당이라고도 불리는 이 예배당은 알바로 데 루나와 그의 가족의 묘지를 위해 의뢰되었다. 앰뷸러토리 중 가장 큰 곳 중 하나로, 이전 예배당 3개의 공간을 차지한다. 팔각형 모양이며, 매우 순수하고 엄선된 플랑보양 양식으로, 스페인에서 존재하는 가장 훌륭한 예 중 하나이다.[24] 외부는 소박하며 완전히 스페인적이다. 화강암이 외장에 사용되었고, 돔은 성벽이 있는 성과 같은 방식으로 뾰족하게 장식되어 있다.
1435년, 카스티야의 대집정관 알바로 데 루나[25]는 자신과 가족을 위한 묘소로 성당에 자신의 예배당을 원했고, 이전 캔터베리의 성 토마스 예배당을 구입했다. 그는 살아있을 때 묘소를 의뢰했으며, 그의 인물은 다소 이상한 장치로 구성된 3차원 조각상으로 만들어졌다. 그가 후안 2세의 명령으로 처형되었을 때, 예배당은 여전히 건설 중이었고, 그의 아내와 딸의 보살핌을 받으며 완성되었다.
제단화는 고딕 양식으로, 페드로 데 구미엘의 작품이며 산초 데 사모라가 그린 14개의 패널로 구성되어 있다. 중앙에는 후안 데 세고비아가 제작한 성 야고보의 기마상이 있다. 프레델라 중앙에는 ''죽은 그리스도 앞에서 우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며, 그 양쪽에는 백작 알바르와 그의 아내가 후원자로 묘사되어 있다. 예배당 중앙에 있는 두 개의 무덤은 알바르와 그의 아내 후아나 데 피멘텔의 것이다. 누워 있는 조각상은 파블로 오르티스의 히스파노-플레미시 조각이다. 왼쪽 벽의 움푹 들어간 곳에는 후안 데 루나(알바르의 아들), 알바르 데 루나(아버지), 후안 데 세레주엘라(형제) 및 페드로 데 루나 대주교(삼촌)의 무덤이 있다.
'''성 레오카디아 예배당'''
성 레오카디아 예배당은 플랑보양 양식으로 조각된 돌 격자창이 있다. 후안 루이스 리베라 사제장의 묘지 예배당으로 사용되었으며, 그의 유골은 틈새 안에 있는 단지 안에 있다. 그의 삼촌인 후안 루이스는 앞 벽에 묻혀 있다. 제단화에는 18세기 라몬 세이로(마리아노 살바도르 마엘라의 제자)가 제작한 성 레오카디아의 이미지가 있다.
'''기둥의 그리스도 예배당'''
기둥의 그리스도 예배당은 매우 작은 공간이다. 가장 중요한 특징은 기도를 드리는 자세로 성 베드로와 성 요한 사이에 기둥 위의 그리스도를 잘 조각한 디에고 코핀 데 홀란다의 제단이다.
5. 4. 1. 원래의 예배당들
성 루치아 예배당은 눈먼 사람들의 수호성인에게 봉헌된 곳으로, 성 요셉 예배당이라고도 불린다. 13세기 건축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내부에 여러 그림과 묘비가 남아있다.[19]구 군주 예배당은 원래 산초 4세가 건설하여 성가대석 높은 곳에 위치해 왕들의 무덤을 안치했던 곳이다. 하지만 시스네로스 추기경의 지시로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도밍고 데 세스페데스가 만든 정교한 격자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으며, 세 개의 제단화가 있는데, 중앙 제단화에는 11개의 히스파노-플레미쉬 양식 패널과 함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가 하사하고 펠리페 4세가 안치한 예수의 거룩한 얼굴 유물이 있다.
성 안나 예배당은 후안 데 마리아나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플라테레스크 양식의 격자 울타리가 특징이다. 톨레도 대성당에서 가장 작은 예배당 중 하나이다.[19]
성 요한 세례자 예배당은 고딕 양식의 격자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다. 니에블라의 부제이자 톨레도 대성당 참사였던 페르난도 디아스 데 톨레도가 후원했으며, 그의 무덤은 1790년에 손상되었으나 엎드린 조각상은 예배당 한쪽에 보존되어 있다. 예배당 안에는 상아로 만든 귀중한 그리스도 조각상이 보관된 성물함이 있으며, 성 브리투스(성 브리시우스) 예배당이었던 공간에 성구실이 있다.[19]
성 길 예배당은 매우 작지만, 톨레도 대성당 예배당 중 보석과 같은 곳으로 여겨진다. 예술적 안목이 높았던 사도적 공증인이자 참사인 미겔 디아스가 후원했으며, 내부 전체를 당시 엘 에스코리알에서 유행하던 폼페이 양식으로 장식했다. 격자 울타리 역시 훌륭한 예술 작품이며, 예배당에는 여러 대리석으로 만든 작은 제단이 있다.[19]
5. 4. 2. 참사회 (Sala Capitular)
참사회는 원래 무사라베 예배당 남동쪽 모퉁이에 위치해 있었으며, 건설되지 않은 두 번째 탑의 기초를 통합하고 있다. 1500년 추기경 시스네로스에 의해 '성체 예배당'으로 명명되었고, 히스파노-무사라베 전례의 신자들을 위한 예배 장소로 사용되었다. 시스네로스는 예배당 설립을 통해 신자들의 일부를 달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0] 무사라베 전례 예배는 현재까지도 이 예배당에서 거행된다.예배당 설계는 팔각형 돔 아래 사각형 평면을 포함한다. 무사라베 양식의 coffered ceiling(천장 장식)은 유실되었고, 현재 돔은 엘 그레코의 아들 호르헤 마누엘 테오토코풀리가 17세기에 설계한 것이다. 내부에는 시스네로스 추기경이 후안 데 보르고냐에게 오란 정복을 묘사하도록 의뢰한 그림이 있다. 고딕 양식 철제 세공 스크린은 후안 프랑세스가 제작(1524)했으며, 시스네로스 추기경의 문장이 장식되어 있다. 18세기 제작된 모자이크 십자가는 로마에서 가져온 것으로, 멕시코 회향 뿌리로 조각된 단일 조각이다. 또 다른 고딕 로즈 스크린은 톨레도 훌리오 파스쿠알의 작품이다.
회랑 예배당 너머에는 참사회가 있다. 디에고 코핀(1510)의 문을 지나면 '안테살라(Antesala)'라는 작은 예배당이 나오는데, 이곳은 참사회로 들어가는 현관 역할을 한다. 안테살라에는 프란시스코 데 라라(1517)의 '아르테소나도'(교차된 얇은 나무판으로 장식된 코퍼 천장)와 후안 데 보르고냐의 플라테레스크 프리즈가 있다. 안테살라는 옷장과 캐비닛으로 꾸며져 있는데, 왼쪽의 헬레니즘 장식 옷장은 그레고리오 파르도(1551)의 작품이고, 오른쪽 옷장은 그레고리오 로페스 듀랑고(1780)의 작품이다. 참사회로 이어지는 사각형 문은 1510년에 마스터 파블로와 베르나르디노 보니파시오 데 토바르가 시스네로스 양식으로 제작했으며, 무데하르 양식과 플라테레스크 장식을 결합했다.
참사회는 시스네로스 추기경이 1504년에 남쪽 측면 앱스에 접하도록 지었고, 설계는 건축가 엔리케 에가스에게 맡겨졌다. 직사각형 방으로, 1508년에서 1510년 사이에 디에고 로페스 데 아레나스와 프란시스코 데 라라가 시스네로스 양식으로 제작한 아름다운 아르테소나도 코퍼 천장이 있다. 붉은색, 파란색, 금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프리즈('알리세르')는 플라테레스크 장식을 하고 있다. 그림과 프리즈는 루이스 데 메디나와 알폰소 산체스(1510)의 작품이다. 방 전체는 사제들을 위한 명예의 자리 역할을 하는 나무 의자가 있고, 방 끝 벽 중앙에는 코핀 데 홀란다가 조각(1514)한 대주교 의자가 있다. 명예의 자리 위, 두 줄로 벽을 따라 성 에우제니우스부터 마지막 대주교까지 모든 대주교 초상화가 있다. 후안 데 보르고냐는 성 에우제니우스부터 시스네로스 추기경까지의 초상화 연작을 그렸다.
초상화 갤러리와 코퍼 프리즈 사이 벽에는 후안 데 보르고냐의 프레스코 연작이 있다. 트롱프뢰유 기둥은 성모 마리아의 생애와 그리스도의 수난 장면이 묘사된 패널을 나눈다.
5. 4. 3. 성 일데폰수스 예배당
성 일데폰수스 예배당은 톨레도 대성당 회랑 중심축에 위치하며, 주 제단 뒤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예배당은 14세기 말 페드로 테노리오 대주교가 건설을 명령하면서, 여러 개의 작은 예배당이 있던 공간을 통합하여 만들어졌다.톨레도의 수호성인인 성 일데폰수스에게 헌정된 이 예배당은 대성당의 역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경우이다. 테노리오 대주교는 1399년 5월 10일에 사망하여 이 예배당에 안장되었다.
예배당은 팔각형 구조로, 14세기 고딕 양식의 4분 볼트로 덮여 있다. 중앙에는 성 일데폰수스의 사르코파구스가 있으며, 이는 13세기 고딕 양식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예배당에는 18세기에 제작된 성 일데폰수스의 바로크 양식 조각상도 있다.
5. 5. 성 야고보 예배당
알바로 데 루나의 예배당이라고도 불리는 성 야고보 예배당은 카스티야의 대집정관 알바로 데 루나[25]가 자신과 가족의 묘지를 위해 의뢰했다. 회랑에서 가장 큰 예배당 중 하나로, 이전의 예배당 세 곳(큰 예배당 하나와 작은 예배당 두 개)을 합쳐 팔각형 평면으로 만들었다. 성 야고보 예배당은 스페인에서 가장 훌륭한 플랑보양 양식의 예 중 하나이다.[24]
'''역사'''
1435년, 알바로 데 루나는 정치적 권력의 정점에 있었다. 그는 자신과 가족을 위한 묘소로 톨레도 대성당에 예배당을 원했고, 12세기에 엘레노어 플랜태저넷 여왕이 의뢰했던 캔터베리의 성 토마스 예배당을 구입했다. 이 예배당은 영국 밖에서 성 토마스에게 헌정된 최초의 예배당이었다. 알바로는 살아있을 때 묘소를 의뢰했으며, 그의 조각상은 미사가 시작되면 무릎을 꿇는 특수 장치를 통해 움직이도록 만들어졌다. 그가 후안 2세의 명령으로 처형되면서 예배당은 미완성이었고, 그의 아내 후아나 데 피멘텔과 딸 마리아 데 루나가 완공했다. 1498년에 부모의 석관 조각을 의뢰했으며, 이는 하네킨 데 브뤼셀의 동료였던 장인들이 예배당을 완성한 해일 가능성이 높다.
'''건축 양식'''
정교한 고딕 양식은 내부의 트레이서리 장식, 맹아치 채광창, 박공, 장식(오픈워크 및 매달린 화환), 천장을 가로지르는 별 모양의 구조적 갈비뼈가 있는 입구 아치에 반영되어 있다. 외부는 소박하며, 화강암을 사용하여 내부의 흰색 석재와 대조를 이룬다. 돔은 성벽처럼 뾰족하게 장식되어 있다.
'''제단화'''
고딕 양식의 제단화는 페드로 데 구미엘의 작품이며, 산초 데 사모라가 그린 14개의 패널로 구성되어 있다. 1488년 마리아 데 루나와 계약을 맺어 제작되었다. 중앙에는 후안 데 세고비아가 제작한 성 야고보의 기마상이 있다. 프레델라 중앙에는 ''죽은 그리스도 앞에서 우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며, 양쪽에는 성 프란치스코와 성 안토니오를 동반한 알바로 데 루나 백작과 그의 아내가 후원자로 묘사되어 있다.
'''매장'''
예배당 중앙에는 알바로 데 루나와 그의 아내 후아나 데 피멘텔의 무덤이 있다. 누워 있는 조각상은 파블로 오르티스의 히스파노-플레미시 조각이다. 알바로 데 루나의 무덤 각 모서리에는 산티아고 기사 한 명이 무릎을 꿇고 있으며, 후아나 데 피멘텔의 무덤 모서리에는 프란체스코 수도사 4명이 있다.
왼쪽 벽에는 후안 데 루나(알바로 데 루나의 아들), 알바르 데 루나(아버지), 체레주엘라의 대주교 후안(형제), 페드로 데 루나 대주교(삼촌)의 무덤이 있다. 인판테 공작들은 예배당 아래에 자체 매장 묘지를 가지고 있다.
5. 6. 북쪽 벽 예배당
성 베드로 예배당은 시계의 문과 성 카테리나 예배당(수도원으로 연결) 사이에 있으며, 산초 데 로하스가 묻혀있어 그의 후원으로 건립되었다. 예배당보다는 교구 교회 역할을 하며, 철제 스크린으로 구분된 입구는 고딕 양식 문으로, 로하스 가문의 문장에 있는 오각형 별 문양이 반복되는 식물 및 문장 테마의 아치볼트로 장식되어 있다. 내부 벽에는 페드로 베르루게테 또는 이니고 코몬테스의 프레스코화가 있으며, 대주교 흉상 이미지가 마지막 아치볼트 꼭짓점에, 오른쪽과 왼쪽에 참사회 14명 주교들의 작은 흉상이 있다. 중앙과 대주교 조각상 위에는 옥좌에 앉은 성 베드로의 고딕 양식 이미지가 있다.자비의 예배당은 안수 담당자 알폰소 마르티네스가 자신의 매장을 위해 설립했으며, 제단은 성 테레사에게 헌정되었다. 성 테레사 이미지는 페드로 데 메나 또는 그의 작업실 작품으로 추정된다.
세례반 예배당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도밍고 데 세스페데스의 철제 스크린이며, 청동 세례반은 고딕-르네상스 요소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라 안티구아 성모 예배당은 장식된 철제 스크린을 갖추고 있으며, 톨레도 무슬림 정복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비르헨 데 라 안티구아'' 아이콘에 헌정되었다.
도냐 테레사 데 아로 예배당은 숟가락의 그리스도 예배당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로페스 데 파디야 가문의 문장에 있는 국자(Spoons)를 참조한 것이다. 이 예배당은 마르샬 디에고 로페스 데 파디야의 미망인 테레사 데 아로가 설립했다.
5. 7. 헤레라 양식 공간의 통합된 통일성
톨레도 대성당 북쪽에는 성구실, 재무관의 안뜰과 저택, 성체 성모 예배당, 팔분의 예배당(유물실)이 위치해 있다. 이들은 건축적으로 하나의 통일된 공간을 이루고 있다.[26]
이 공간들은 16세기 후반 가스파르 데 키로가 추기경의 주도로 건축되기 시작했다. 니콜라스 데 베르가라 엘 모소가 설계와 평면도를 맡았으며, 왕립 병원을 철거하고 이전 부지에 재건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17세기에는 베르나르도 데 산도발 이 로하스 추기경과 건축가 니콜라스 데 베르가라의 감독 하에 건축이 계속되었다.[26]
5. 7. 1. 성구실
성구실은 대성당 북쪽에 위치하며, 성막 예배당, 팔분의 예배당(유물실) 등과 건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26]
성구실에는 대성당 소장품의 여러 예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실은 직사각형 방으로, 빈센초 카르두치, 에우제니오 카세스, 프란시스코 리치, 루카 조르다노 등의 이탈리아 화가들의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다. 성구실 자체는 프란시스코 베르가라 엘 마요르와 후안 바우티스타 모네그로가 에레라 양식으로 설계했다. 루네트가 있는 아치형 천장은 루카 조르다노의 프레스코로 장식되어 있는데, 주요 주제는 '성 일데폰수스의 제의 착복'이다.

벽에는 여러 거장들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엘 그레코의 작품이 15점이나 된다. 그중에서도 엘 그레코의 '엘 엑스폴리오'('그리스도의 옷 벗기')는 대리석 세공과 코린트식 기둥으로 틀이 짜여 있으며, 2014년 프라도 미술관에서 보존 작업을 마치고 돌아왔다.[26] 이 외에도 루이스 데 모랄레스, 페드로 데 오렌테, 후안 판토하 데 라 크루스, 후안 데 보르고냐, 루이스 트리스탄, 안토니 반 다이크, 프란시스코 고야('그리스도의 체포'), 바사노 더 영거 등의 작품이 있다.
또한, 1250년에 제작된 '성 루이스의 풍요한 성서'는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가 구입한 것으로, 750개의 소형 그림과 5,000개 이상의 필사본 페이지 그림이 포함된 귀중한 유물이다.[26] 다음 방인 의상실에는 클라우디오 코엘료와 호세 도노소가 그린 천장화가 있다. 티치아노의 ''교황 바오로 3세'', 벨라스케스의 ''가르디날 가스파르 데 보르하'', 카라바조의 ''세례자 요한'', 조반니 벨리니의 ''그리스도의 매장'' 등 다양한 그림들이 소장되어 있다.[26]
의상 컬렉션에는 16세기와 17세기 제의를 포함한 70개의 예복이 있다. 아라곤의 산초 대주교의 케이프와 길 데 알보르노스 추기경의 케이프가 대표적이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가 착용했던 교황 삼중관 덮개도 있다. 리요 살라도 전투에서 얻은 아랍 깃발과 70점 이상의 태피스트리도 전시되어 있으며, 루벤스의 스케치도 볼 수 있다.[26]
5. 7. 2. 성체 성모 예배당
성체 성모 예배당(Capilla de la Virgen del Sagrarioes)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조각상인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예배당으로, 13세기에 은으로 도금되고 진주가 박힌 망토를 입고 있다. 이 성상은 '성 마리아'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전설에 따르면 이 성상은 사도들에게 속했으며 성 에우제니오에 의해 톨레도에 전해졌다고 한다. 또한, 이 성상은 무슬림 통치 기간 동안 숨겨졌다가 알폰소 6세 왕에 의해 나중에 복원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26]벽은 대리석으로 덮여 있으며, 거대한 돔은 펜덴티브에 의해 지지된다. 북쪽 벽에는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가 있는 제단이 있으며, 측면 벽 중 하나에는 산도발 이 로하스 추기경의 묘가 있다.
이 예배당은 팔분의 일 예배당과 함께 톨레도 대성당에서 에레라 양식 건축의 가장 훌륭한 사례로 손꼽힌다. 16세기 후반의 엄격한 에레라 양식으로 지어진 이 예배당의 웅장한 새로운 구조와 장식은 베르나르도 데 로하스 이 산도발 추기경의 후원에 기인한다. 이 공사는 니콜라스 데 베르가라 엘 모소에 의해 시작되어 1616년경에 완성되었다. 후안 바우티스타 모네그로와 엘 그레코의 아들인 호르헤 마누엘 테오토코풀리도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26]
5. 7. 3. 팔분의 예배당
팔분의 예배당은 팔각형 평면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었으며, 많은 유물을 보관하고 있어 유물 예배당이라고도 불린다.[26] 예배당 입구는 성막 예배당 제단을 양쪽에 둔 두 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벽은 대리석 세공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예배당은 지붕 등불 쿠폴라가 있는 돔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돔은 호르헤 마누엘 테오토코풀리의 작품이며, 돔 내부 자체는 화가 프란시스코 리치와 후안 카레뇨가 장식했다. 벽에 반쯤 부착된 제단에는 역사적, 예술적으로 흥미로운 유물함이 있다.[27] 유물에는 성 레오카디아(스페인-로마 톨레도 처녀)의 베일 조각이 포함되어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성 이르데폰수스가 666년에 그녀가 나타났을 때 성녀의 몸에서 잘라낸 것이라고 한다. 레케스빈트는 이 행위를 수행하기 위해 성자에게 칼을 빌려주었다고 하며, 그 칼도 유물로 보관되어 있다.5. 8. 스테인드 글라스 창
톨레도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매우 아름답고 중요한 예술 작품이다. 톨레도 대성당은 중세 시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는 카스티야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9]이 창문들은 14세기부터 17세기에 걸쳐 제작되었으며, 18세기에는 시대 변화에 따라 양식이 바뀌면서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는 트란셉트(transept, 십자형 성당에서 좌우로 뻗은 부분)의 '장미 창문'(시계의 문 위에 위치)과 앰뷸러토리(ambulatory, 주 제단 뒤쪽의 통로)의 일부 창문들이다. 이 창문들은 부드러운 색상을 띠고 있다. 주 제단과 동쪽 트란셉트 북쪽 통로에 있는 창문들은 거대한 성인과 사도들의 모습을 담고 있어 더욱 인상적이다.[9]
15세기 창문 제작자로는 유리 제작자 야코보 돌핀(Jacobo Dolfin)과 그의 조수 루이스(Luis), 장인 페드로 보니파시오(Pedro Bonifacio), 크리스토발(Cristóbal), 독일인 수도사 페드로(Pedro), 톨레도 출신 장인 엔리케(Enrique) 등이 기록되어 있다.[9]
16세기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제작된 인물들로 장식되어 있다. 바스코 데 트로야(Vasco de Troya, 1502), 후안 데 쿠에스타(Juan de Cuesta, 1506), 알레호 시메네스(Alejo Ximénez, 1509–1513) 등이 측면 네이브와 서쪽 파사드의 창문 작업을 맡았고, '장미 창문'과 '사자의 문'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은 니콜라스 데 베르가라 엘 모소(Nicolás de Vergara el Mozo)의 작품이다.[9]
18세기 초에는 손상된 스테인드글라스를 교체하기 위해 새로운 스테인드글라스가 제작되었다. 대성당의 마지막 유리 제작자 중 한 명인 프란시스코 산체스 마르티네스(Francisco Sánchez Martínez)는 뛰어난 복원가였지만, 새로운 디자인은 제작되지 않고 이전의 모티프(motif, 디자인의 기본 주제나 문양)가 반복되었다. 스페인 내전 동안 유리가 심하게 손상되었으나, 20세기 후반에 대대적인 복원 작업을 통해 이전 시대의 화려함을 되살렸다.[9]
5. 9. 엘 트란스파렌테


대성당의 가장 뛰어난 특징 중 하나는 ''엘 트란스파렌테(El Transparente)''라고 불리는 바로크 제단화이다. 이 이름은 고제단 뒤의 회랑을 가로지르는 두꺼운 벽의 매우 높은 곳에 뚫린 큰 채광창과 제단화 뒷면에 뚫린 또 다른 구멍을 통해 제공되는 독특한 조명을 지칭하며, 이 구멍은 햇빛이 성체 보관소에 닿도록 한다. 또한, 이 아래쪽 구멍은 회랑에 있는 사람들이 제단화를 통해 성체 보관소를 볼 수 있게 하여, 말하자면 그 투명성을 통해 볼 수 있게 한다.[9] 이 작품은 톨레도 대주교 디에고 데 아스토르가 이 세스페데스에 의해 의뢰되었으며, 그는 성사를 영광스러운 기념물로 표시하고자 했다.
''엘 트란스파렌테''는 여러 층 높이이며, 회반죽, 그림, 청동 주조, 그리고 여러 색상의 대리석으로 훌륭하게 제작된 환상적인 조각상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나르시소 토메와 그의 네 아들(건축가 2명, 화가 1명, 조각가 1명)이 제작한 바로크 양식의 혼합 매체 걸작이다. 아침에 미사가 진행되고 해가 동쪽에서 비칠 때 조명이 강화되는데, 적절하게 배치된 채광창에서 들어오는 햇살이 제단화 뒷면의 구멍을 통해 성체 보관소를 비추어, 제단 전체가 천국으로 솟아오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완벽한 바로크 양식의 전시물은 대성당의 주된 고딕 양식과 강하게 대조를 이룬다.
5. 10. 대성당의 르네상스 레하 (Rejería)
16세기에 합창단, 예배당, 때로는 제단 앞에 설치된 장식 철제 스크린인 ''레하''는 르네상스 양식으로 제작되었다. 스크린의 막대, 기둥, 문장은 매우 섬세하게 만들어졌으며 종종 정교한 금세공이 포함되었다. 막대는 섹션을 연결하거나 나누는 주요 요소이며 때로는 촛대와 ''테네브라리오'' (삼각형 촛대)의 지지대 역할을 한다. 제작 과정에서 먼저 대장간에서 망치와 모루로 작업한 다음 선반으로 가공했다. 르네상스 스크린은 가로 막대로 두세 개의 수평으로 나뉘며, 가로 막대는 다시 더 얇은 수직 막대 사이에 삽입된 기둥으로 수직으로 나뉜다. 거의 모든 스크린은 신화 속 인물, 메달, 촛대, 문장으로 장식되어 있다. 철로 단조되었으며 나중에 금이나 은으로 도금되었다.[9] 대성당에서 작업한 주요 레헤로(레하 제작자)는 도밍고 데 세스페데스, 프란시스코 데 비야판도, 후안 프란세스, 훌리오 파스쿠알이었다.5. 11. 대성당의 주요 보물
보물 예배당은 원래 탑 예배당이 있던 자리인 성 요한의 옛 예배당에 위치한다. 이 예배당은 대성당 탑 바로 아래, 북쪽에 있는 모사라베 예배당 앞에 있었다. 이전에는 신 군주 예배당의 성구실 역할을 했다.[28] 1537년 알론소 데 코바루비아스가 르네상스 양식으로 설계하고 건설했으며, 1870년부터 "Las Alhajas" (보석)이라고 불리는 대성당 보물의 보관소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건물은 코바루비아스가 설계한 독특한 외관을 가지고 있다. 원래 타베라 추기경의 묘지 예배당으로 계획되었기 때문에, 조각품들은 그의 삶과 죽음을 모두 암시한다. 정면은 화려한 두 기둥으로 둘러싸인 닫힌 둥근 아치 형태이며, 상인방이 있는 문이 열려 있다. 코바루비아스는 아치와 상인방 사이 공간(팀파눔)에 성 요한 세례자 흉상을 조각했고, 양옆에는 천사 형태의 지지대가 있는 메달(톤도)이 있다. 성 요한 세례자는 타베라 추기경의 수호 성인이었다. 그 위 틈새에는 쿼바디스 전설의 사건을 묘사한 조각 그룹(올라르테 작품)이 있는데, 죽음을 암시하는 조개 껍질 바닥 위에 새겨져 있다. 틈새 양쪽에는 타베라 추기경의 문장(팀파눔에 작은 크기로 반복)이 있고, 그 아래에는 대성당의 후원자였던 디에고 로페스 데 아얄라의 문장이 있다.
보물 예배당 내부는 금색과 검은색으로 칠해진 아르테소나도 천장을 가지고 있으며, 조각된 꽃과 인물들로 장식되어 있다. 내부에는 예배용품, 유물, 주교 지팡이, 의복 등 대성당의 보물을 담은 여러 유리 진열장이 있다. 특히 펠리페 코랄이 수놓은 '사그라리오의 비르헨' 망토는 스페인에서 가장 뛰어난 자수 표본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 망토는 12야드의 은색 천에 금, 진주,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로 장식되어 있다. 후안 마르티네스 몬타녜스와 페드로 데 메나의 조각품,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의 나무 조각상도 있다. 보물 중 가장 귀중하고 중요한 작품은 엔리케 데 아르페의 기념비적인 성체 현시대(성광)이다.[30]
5. 11. 1. 아르페의 대형 성광

엔리케 데 아르페가 제작한 대형 성광은 톨레도 대성당 보물실에 보관되어 있는 가장 중요한 물건으로, '톨레도의 대형 성광'이라고도 불린다. 최고급 은과 금, 보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3미터가 넘는다.[30]
아르페는 독일 쾰른 근처 출신의 금속 세공인으로, 시스네로스 추기경의 의뢰를 받아 1517년부터 1524년까지 7년에 걸쳐 이 성광을 제작했다.[31] 늦고딕 양식으로, 기둥, 아치, 아치형 천장 등 모든 건축 세부 사항이 정교한 레이스 세공처럼 표현되어 있다. 구세주의 생애 장면이 부조로 묘사되어 있고, 260개의 작은 조각상들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32] 육각형 받침대 위에 작은 기둥들이 솟아 있고, 보석, 천사, 성인 조각상, 플뢰롱(꽃 모양 장식), 작은 종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꼭대기에는 17세기 십자가가 있고, 받침대는 18세기 바로크 양식이다. 원래 은으로 만들어졌으나, 키로가 대주교가 제단의 금도금된 나무 감실과 맞추기 위해 금도금을 지시하여 1595년에 금도금이 완료되었다.
시스네로스 추기경은 이사벨 1세의 성광보다 더 웅장한 성광을 원했으며, 제작 비용은 1,500만 마라베디를 넘었다. 아르페는 2,700 레알을 받았고, 1523년 크리스마스에 톨레도 대성당 참사회로부터 2,500 마라베디의 보너스를 받았다.
1595년부터 톨레도의 그리스도의 성체 축일 행렬에서 이 성광을 수레에 싣고 운반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정치 및 교회 고위 인사들이 성광 앞에 서고, 보병 사관학교 생도들이 뒤따른다. 성광은 12,500개의 볼트와 260개의 조각상으로 구성된 5,600개의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18캐럿 금 18킬로그램과 순은 183킬로그램이 사용되었으며, 콜럼버스가 신세계에서 가져온 첫 번째 금이 포함되어 있다고 전해진다.
아르페의 성광에는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
> 돈 프란시스코 히메네스 시스네로스 추기경, 톨레도 대주교 추기경, 스페인 총독이자 아프리카 정복자는 이 감실을 그리스도의 지극히 거룩한 몸을 위해 제작하도록 의뢰했으며, 공석 기간 동안 완성되었으며, 디에고 로페스 데 아야라의 작품이다. 주님의 해 1524년.
2011년 세계 청소년의 날에는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주재하는 성체 숭배에 사용하기 위해 쿠아트로 비엔토스 공항으로 옮겨졌다. 현재 대성당 내에서 방탄 유리와 자동 보안 시스템으로 보호받고 있다.
5. 12. 대성당에 묻힌 군주들
왕국 | 군주 | 비고 |
---|---|---|
레온 왕국 | 산차 2세 (1230년 사망) | 레온 여왕 |
카스티야 왕국 (카스티야-레온 왕국) | 산초 3세 (1157–1158 재위) | 주 제단 |
알폰소 7세 황제 (1126–1157 재위) | 주 제단 | |
산초 4세 용감왕 (1284–1295 재위) | 주 제단 | |
엔리케 2세 (1369-1379 재위)와 그의 아내 후아나 마누엘 | 신 군주 예배당 | |
후안 1세 (1379-1390 재위) | 신 군주 예배당 | |
엔리케 3세 병약왕 (1390–1406 재위)와 그의 아내 랭커스터의 캐서린 (1373–1418) | 신 군주 예배당 | |
후안 2세 (1406-1454 재위) | 신 군주 예배당에 가묘, 실제 시신은 부르고스의 미라플로레스 수도원에 안치 | |
포르투갈 왕국 | 산초 2세 경건왕 (1223–1248 재위) | 왕위에서 폐위되어 톨레도로 망명, 1248년 1월 4일에 사망 (역사적 추정) |
6. 회랑
페드로 테노리오 대주교는 과거 유대인 상업 지구였던 ''알카나'' 부지에 자신의 묘소로 사용할 회랑과 예배당을 대성당 북쪽에 건설하도록 계획했다.[9]
회랑 건물은 1389년 8월 14일에 착공되어 1425년에 완공되었다. 건축가 로드리고 알폰소와 알바르 마르티네스가 사분 4분할 볼트로 구성된 4개의 복도를 건설하였다.[9] 회랑 건설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테노리오 대주교가 회랑을 건설하려던 장소는 지역 시장 박람회가 열리던 곳이었는데, 상점 주인들은 이전을 꺼렸다. 역사가 에우제니오 나르보나는 대주교가 부지 점유에 대한 열망이 컸다고 기록했다. 대주교와 소유주 간의 협상 중, 큰 화재로 시장 전체가 파괴되었다. 테노리오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부지를 확보했고, 이 때문에 재앙을 유발했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9]
지형을 고려하여 회랑 기초 지면은 대성당 바닥보다 약 1.52m 높게 들어 올려졌다. 이는 시스네로스 추기경 취임 후 두 높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게 하였다. 테노리오 대주교는 회랑의 웅장함이 고딕 양식 대성당에 어울리도록 노력했다. 1층 갤러리에는 성 에우제니오, 카실다, 엘라디오의 삶을 묘사한 프레스코화 연작이 있는데, 이 중 11개는 바유가, 2개는 데 마엘라가 그렸다.[9]
대성당에는 수도회가 없었기 때문에, 회랑과 그 주변 구역들은 창고, 교실, 상업 거래 중심지 (옛 ''알카나''의 의미), 기도소, 시청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9]
6. 1. 성 블레이즈 예배당
페드로 테노리오 대주교는 자신의 매장지로 사용하기 위해 회랑과 성 블레이즈 예배당을 건설하도록 지시했다. 성 블레이즈 예배당은 회랑에서 접근 가능하며, 매장 용도임을 나타내는 팔분 돔형 천장으로 덮여 있다.[9]성 블레이즈 예배당 건설은 1389년에서 1398년 사이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1399년 5월 10일 테노리오 대주교 사망 직전에 완공되었다. 대주교는 성 블레이즈에게 헌정하는 글과 유언을 남겨 예배당 유지 관리를 위한 임대료 징수 및 대성당 참사회의 관리를 명시했다.[9]
예배당은 거리보다 약 7m 아래에 위치한다. 대주교는 건물 외부 지면을 메워 올리도록 했는데, 이는 습기 문제를 야기하여 예배당 내부 벽화, 특히 하단 부분에 심각한 손상을 초래했다. 이러한 결정은 건물의 시각적 문제를 고려해 건설이 상당히 진행된 후 내려졌다.[9]
예배당 내부는 두 부분으로 장식되었다. 처마 장식에서 천장까지는 사도신경이 14개 장면으로, 처마 장식 아래쪽에는 최후의 심판과 성자들의 삶을 그린 장면들이 있다. 게라르도 스타르니나와 니콜라스 데 안토니오 등 피렌체 화가들의 작품으로 추정되나, 작가가 명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과도한 습기와 부적절한 복원으로 인해 바닥에 가까운 그림들은 심하게 손상되어 일부는 복구가 불가능하다.[9]
21세기 초, 성 블레이즈 예배당 벽화에 대한 대대적인 보존 및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다. 프레스코화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원래 색을 복원했으나, 벽 하단부의 복구 불가능한 부분은 제외되었다. 또한, 거리에서 스며드는 물을 차단하여 추가적인 손상을 방지하는 작업도 거의 완료되었다.[9]
7. 대성당의 음악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 전역의 수도원에서 종교 음악이 발전하면서, 톨레도 대성당에서도 음악은 성찬례 전례의 핵심적인 부분이 되었다. 1440년 이후, 다성 음악 성악곡이 카스티야와 아라곤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오르간은 대성당과 대주교의 교회에 설치되어 기악 연주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1]
톨레도 대성당에서 가장 중요한 오르간은 트란셉트에 있는 "황제의 오르간"이다. 그 외에도 프라이 호세 데 에체바리아가 만든 "제너럴" 오르간, 호세 베르달롱가가 만든 오르간, 시스네로스 추기경이 모사라베 전례 예배당에 도입한 오르간 등이 있다. 다른 중요한 예배당에도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었다.[1]
오르간 외에도 플라젤레트, 플루트, 색버트 등의 관악기와 하프, 비올라 등의 현악기가 도입되었다. 16세기와 17세기에는 음악 예배당이 창설되면서 오보에와 더블 베이스가 미사 축하에 통합되었다.[1]
대성당의 어린이 합창단인 "6인조"는 실리세오 추기경이 창설한 성악 그룹으로, 1557년 성모 마리아 인판테스 대학을 설립하여 이들을 교육했다. 이들은 붉은 옷과 흰색 서플리스를 입고 전례 봉사에서 노래했다. 대학에서는 ''마에스트로 데 카피야''와 교수들이 소년들과 함께 생활하며 음악 교육을 담당했다.[1]
''마에스트로 데 카피야'' 중에는 크리스토발 데 모랄레스가 뛰어났는데, 그는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에서 일했으며 많은 미사와 모테트를 작곡했다. 다른 ''마에스트로 데 카피야''로는 마티아스 듀랑고 데 로스 아르코스, 알론소 로보, 후안 보네트 데 파레데스 등이 있었다.[1]
톨레도 대성당의 음악은 스페인 종교 음악, 특히 모사라베 성가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그레고리오 성가의 변형을 도입하고, 다른 대성당의 합창단 훈련에도 기여했다. 1851년 정교 조약 이후, 이들의 작곡 대부분은 대성당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1]
8. 종교 건축에 미친 영향
로드리고 히메네스 데 라다 주교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프랑스 고딕 건축 양식으로 건축하거나 설계 경험이 있는 장인을 고용했다. 파리나 르망 대성당이 그들의 참고 대상이었다. 프랑스 고딕 건축가들의 건설적인 해결책(예: 카운터 레스트, 부벽, 뾰족 아치)은 널리 수용되었지만, 스페인 건축가들은 프랑스 대성당의 배치(예: 합창단과 제단이 인상적인 성소에 위치)를 거부하고, 더 작은 규모를 선택하여 합창단을 중앙 본당에 배치했다. 이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에서 먼저 나타난 혼합적인 해결책이었으며, 스페인에서 무사라베 의식의 영향뿐만 아니라 서고트 전통과 카스티야 전례에 의해 발전했다.[10]
이러한 역사적 발전은 수좌 대성당의 지위와 결합되어, 부르고스 대성당과 레온 대성당을 제외한 다른 스페인 대성당에서 톨레도 모델을 채택하도록 장려했다. 카디스 대성당, 세비야 대성당, 팔마 데 마요르카 대성당 등에서도 유사한 공간 배치를 볼 수 있다. 스페인 제국은 ''Dives Toletana''의 모델을 아메리카와 필리핀에서 건설된 건축물에까지 영향을 미쳤다.[11][12]
9. 인용문
프랑스 역사학자이자 고고학자인 엘리 람베르(Élie Lambert, 1888–1961)는 고딕 미술 전반과 톨레도 대성당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수행했으며, 다음과 같이 썼다.
:"톨레도 대성당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며, 여러 세기에 걸쳐 서로 매우 다양한 훌륭한 예술 작품들이 축적되어 그 풍요로움과 다양함의 매력이 놀라움을 자아낼 정도이다."
교육자이자 스페인 대학교수인 마누엘 바르톨로메 코시요(Manuel Bartolomé Cossío, 1857–1935)는 다음과 같은 비평을 했다.
:"톨레도 대성당은 모든 고딕 건축물 중 가장 명확하게 스페인적인 사례이며, 여기서 고전 양식으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아름다움과 완벽성 측면에서 스페인 최고이며 세계적으로도 독특하다. 직사각형과 삼각형을 통해 통로 문제를 해결했다."
마드리드에서 태어난 건축가 레오폴도 토레스 발바스(Leopoldo Torres Balbás, 1888–1960)는 Ars Hispaniae, VII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내부 [톨레도 대성당]로 들어가면, 길이 120미터가 넘고 폭이 약 60미터인 거대한 홀에서, 침착함과 조화의 걸작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 형태의 유사성을 생각하면 프랑스 대성당의 세계와는 매우 다르다. 웅장한 상승 리듬 대신, 톨레도 대성당은 높이 차이가 크지 않은 5개의 계단식 회랑으로, 어떠한 과장됨 없이 균형 잡힌 비율을 가지고 있다. 성소는 프랑스 대성당과 비교했을 때 작고 평평하게 솟아 있다. 건축에서 공간감과 같은 매우 중요한 점에서 카스티야 사원은 파생된 프랑스 모델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현명왕 알폰소 10세는 다음과 같이 건축 이유를 설명한다.
:"그리고 왕은 돈 로드리고 대주교와 함께 톨레도 교회 곁을 거닐며 그 맛을 음미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너무 낡았다고 생각했다. 그의 술을 자제시키자, 하나님의 영과 성스러움이 그에게 임하여 페르난도 왕을 제어하여 하나님이 그를 갱신하시고 기독교가 잃었던 땅에서 무어인들을 정복하게 하셨는데, 그 이득으로 톨레도 성모 마리아 교회를 갱신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는 매우 옳고 정당한 이유가 되었다. 그래서 페르난도 왕과 로드리고 대주교는 그 일을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톨레도 성모 마리아 교회의 첫 번째 돌을 놓았고, 왕과 대주교가 함께 돌을 놓았다... 그리고 그 작업은 날마다 놀랍도록 성장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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